By Raymond
1955년 12월 5일 저녁, 몽고메리 개선 협회(Montgomery Improvement Association)의 집회에서 26살의 마틴 루터 킹 목사는청중을 향해 담대하게 선언했습니다.
나흘 전에 전미 유색인 지위 향상 협회(NAACP) 몽고메리 지부의 서기로 활동하던 로사 파크스가 버스에서 백인 승객에게자리를 내어주지 않겠다고 하자 시 조례 위반 혐의로 체포되었고, 이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몽고메리의 흑인 주민들은 12월5일에 버스 탑승을 거부했습니다. 일회성으로 시작되었던 이 불매운동은 장장 13개월 동안 이어졌고, 공공 버스에서의 인종차별은 위헌이라는 연방 대법원 판결이 선고된 후에야 종료되었습니다. 버스 불매 운동을 주도했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이계기로 민권 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오이코스는 마틴 루터 킹 목사를 기념하는 공휴일을 앞두고 1박 2일 동안 미국 민권 운동의 중심지였던 앨라배마의 버밍햄과 몽고메리를 답사했습니다.
첫 방문지인 버밍햄의 민권 기념관(Civil Rights Institute)에서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미국 남부에서 시행되었던 인종 차별 정책(segregation)의 현실과 1950, 60년대 민권 운동의 주요 사건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기념관 안에서 창문 너머 보이는 공원은 1963년 5월, 어린 학생들이 맹견과 물대포를 앞세운 지역 경찰의 진압을 무릅쓰고 거리로 나섰던 시위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기념관 옆에는 민권 운동의 중심지였던 16번가 침례교회가 있었습니다. 1963년 9월 15일 아침, 이곳에서 백인 우월주의자들이 일으킨 폭탄 테러로 주일 예배 전에 여학생 4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고요하고 한적하기만 했던 토요일 오후, 버밍햄 시내의 거리에 서서 16번가 침례교회를 바라보니 불과 60년 전에 그런 비극적인 사건이일어났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습니다.
둘째 날에는 숙소를 떠나 셀마에 있는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로 향했습니다. 1965년 3월 7일, 수백 명에 이르는 민권 활동가들이 흑인 주민들의 투표권을 보장할 것을 요구하며 셀마를 출발해서 앨라배마의 주도인 몽고메리를 향해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지역 경찰이 다리를 가로막고 있었고, 경찰이 다리를 건너는 행진대를 무력으로 진압하면서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습니다.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로 불리는 이 사건의 여파로 인해 린든 B. 존슨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행진 지지 성명을 발표하고 선거권법을 발의했습니다. 행진대는 연방 법원의 승인과 연방 정부의 보호 아래 3월 21일에셀마를 출발해서 54마일을 걸은 후에 3월 25일에 몽고메리에 도착했으며, 존슨 대통령은 8월 6일에 선거권법(Voting Rights Act)에 서명을 했습니다. 매서운 바람 때문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다리의 초입에 서니 1965년 3월의 광경을 떠올리지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내 저희는 차를 타고 행진대가 60년 전에 걸어갔던 도로를 따라 몽고메리의 레거시 박물관으로 향했습니다. 대서양 노예무역의 비참한 역사부터 시작해서 지금도 계속되는 ‘대량 투옥'(mass incarceration)의 현실까지, 인종 차별과 이에 따른 폭력과 억압이 미국의 역사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전시를 둘러본 후에는 앨라배마 강변에 있는 자유 기념 조각공원을 산책하며 인종 차별의 아픔을 예술로 담아낸 다양한 작품을 감상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정으로 박물관 인근에 있는 평화와 정의를 위한 기념관을 방문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린칭(초법적 살해)로 목숨을 잃은 4,000명 이상의 피해자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이 기념관에는 미국의 각 주와 카운티마다 발생한 린칭사건의 날짜와 피해자의 이름이 모두 새겨져 있습니다. 기록이 전혀 남지 않은 무명의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기념관 한쪽 벽에는 “We will remember”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 한 문장의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게 다가왔습니다.
일요일 저녁, I-85를 타고 애틀랜타로 돌아오는 길에서 이틀 동안 보고 배운 모든 것을 떠올리며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몽고메리의 수많은 주민이 무더운 여름에도, 찬바람이 부는 겨울에도 버스를 타지 않고 1년이 넘도록 학교와 직장까지 걸어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버밍햄 시내의 거리에서, 에드먼드 페터스 다리 위에서 끝까지 비폭력의 원칙을 지키며발걸음을 내딛을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왔는지.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칠흑 같은 어두움 가운데서도 절망하지 않고 인간의존엄성을 세상에 외치고 지켜낼 수 있는 원동력은 무엇이었는지.
1963년 4월, 시위에 동참하기로 한 결정을 비판했던 현지의 목사들을 향해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옥중에서 한 장의 편지를 썼습니다. 버밍햄까지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I cannot sit idly by in Atlanta and not be concerned about what happens in Birmingham. Injustice anywhere is a threat to justice everywhere. We are caught in an inescapable network of mutuality, tied in a single garment of destiny. Whatever affects one directly, affects all indirectly.”
오이코스에 모인 한 명 한 명이 애틀랜타에 오게 된 이유와 배경도 다르고, 학업을 마친 후에 나아갈 길도 다를 것입니다. 잠깐 거쳐가는 사람도, 오래 머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곳에서 함께 보내는 시간 동안 저희에게 주어진 신앙을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지, 각자의 자리에서 어떻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살아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고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가져봅니다.
이번 1박 2일이 바로 그런 시간이었고, 앞으로도 있을 다양한 기회와 시간들을 기대해 봅니다.
#justice, #campus ministry, #atlanta, #emory